성춘향과 장자연.. 우리 그 눈물 닦아줄 수 있을까...
- 21세기. 조선시대보다 참혹한...
고 장자연씨가 남긴 편지 일부가 공개됐다고 한다. 100번 넘게.. 부모님 제삿날에도 끌려가 유린을 당했다고 한다.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과연 당당히 세상을 활보하며 또 다른 사냥에 나서고 있을 그 짐승 같은 자들은 최소한의 처벌이라도 받게 될까.
어느새 2년인가 보다. 내가 장자연씨가 남겼다는 편지를 인터넷에서 본 건 일본과의 월드베이스볼클래식 결승전이 열리던 날이었다. 나는 그 날 차라리 한국이 지기를 바랐다. 저 슬프고 고독하며 처절한 죽음을 뒤로 한 채 승리의 환호를 즐긴다는 건 너무나 잔인한 일이었다. 우리 사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편지에서 나를 무엇보다 슬프게 한 건 “내가 부모가 없어서 이렇게 당한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그 순간 그 일의 맥락이 한눈에 읽혔다. 저 권력과 금력은, 제 몸처럼 지켜줄 사람이 없는 이 한 명의 ‘만만한’ 여인을 처음부터 ‘상납용’으로 키웠던 것이었다. ‘이쁜 연예인’을 밝히는 그 자들, 그 ‘짐승’들을 위하여(짐승은 장자연씨가 직접 쓴 표현이다).
그 순간 나한테 떠오른 것은 춘향이었다. 기생의 딸로 태어나 기생이 되어야 했던 여인. 태어나고 보니 기생이라는 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남자들한테 몸을 바치며 살아야 하는 운명으로 태어났다는 건 얼마나 기막힌 일인지! 그 운명을 거부하려는 그 여인에게 돌아온 것은, ‘내가 좋아하는 남자를 기다리게 해달라’는 그 여인에게 돌아온 것은 무지막지한 고문이었다.
신관사또는 관속과 마을주민들이 다 모인 부임식 자리에서 그 여인에게 태장을 명령한다. 한 대에 매가 부러져 나가고 피가 흐른다.. 한 대 치고 그만 둘까, 세 대 치고 그만둘까.. 그렇게 내려친 매질이 무려 삼십 대. 어린 여인의 몸은 걸레처럼 찢겨진다.
춘향이 거동 보소 정신이 캄캄 살아날 길 전혀 없다. 도화 같은 두귀 밑에 흐르느니 눈물이요, 백옥 같은 두 다리에 솟느니 유혈이라.
이때 춘향이는 목에 숨이 출입 없고 사지에 맥이 약존약무(若存若無), 더운김 식은 땀이 이마 전에 송글송글 맺혀 아침 볕에 서리 녹 듯. 장독(杖毒)에 부푼 얼굴 화기가 별로 없고, 맥 끊어진 두다리가 유혈 속에 달막달막.
도대체 왜 이런 매질을 당해야 하는가. 이유는 딱 한 가지. 기생의 딸로 태어났다는 것이 죄였다. 권력 가진 남정네의 노리개 노릇을 감수해야 하는데, ‘송충이’ 주제에 언강생심 사람 노릇을 하려 한 것이 죄였다. 가진 자들한테 있어, 그 까짓것 밟아 죽이는 것이야 눈 깜짝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저 춘향에게는 그래도 ‘어머니’가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을 매 한 대 안 때리고 곱게곱게 키워서 자기하곤 다른 삶을 살기를 절실히 원했던 어머니가. 이렇게 딸을 위해 울어줄 어머니가.
향단은 춘향 업고 여러 기생 칼머리 들고 옥으로 내려갈 때, 춘향어멈 달려들어 얼굴을 한테 대고 목탁입을 비죽비죽. 검버섯 돋은 귀밑에 눈물이 그저 좔좔.
그리고 그 춘향 곁에 누가 있었는가 하면 남원고을 민초들이 있었다. 처음엔 춘향을 시샘하기도 조롱하기도 했던 그들. 춘향이 권력에 의해 저렇게 당하는 것을 보고 서로 한 마음이 된다. 일촉즉발로 들끓는 민심. 만약 변학도 생일날 춘향이 벌을 받아 죽기라도 했다면, 사람들은 가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목숨을 내어놓고라도 들고 일어나 관아를 뒤집어놓았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추단이 아니다. 이해조 옥중화 판본에 보면, 남원 고을 머슴들이 변학도 생일날을 거사일로 삼아 사발통문을 돌리는 내용이 있다.)
남원고을 민초들. 그들은 마침내 춘향을 지켜낸다. 암행어사를 통해 변학도를 파직시키고, 춘향을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도록 한다. 비록 소설 속의 일이지만 말이다. (김학준씨 같은 일부 정치학자들은 이도령이 변학도를 파직시킨 것을 연적에 대한 사적 복수라고 주장한다. 지배권력의 논리로만 보면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껍데기일 뿐. 이 작품 속의 어사는 엄연히 민초의 대변자로 움직이고 있다. 이른바 ‘국민의 명령’에 의해..)
아아, 자기를 위해 울어줄 어머니조차 없던 21세기의 저 가여운 여인은, 참혹하게 유린되어 고독하게 죽어가고 말았다. 아무도 자기를 지켜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분노와 저주로 울부짖었을 그 심정... 오죽하면 “죽어서라도 꼭 복수를 하겠다”고 했을까?
“무명인 내가 죽어버린다고 세상이 눈 하나 깜짝할까” 하고 썼다고 한다. 이건 우리에게 하는 말이다. 너희들 그렇게 가만히 있겠느냐는 말이다. 구하고 지켜주지 못한 우리는 그 참혹한 죽음의 공범자이다. 죽은 이의 원한조차 풀어서 달래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간으로서 자격을 가질 수 없다.
춘향을 지켜주고 그 눈물을 닦아주었던 조선시대의 민초들. 법과 정보와 네트웍을 다 가지고 있는 21세기의 우리들... 과연 우리는 저 여인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또 다시 권력과 금력 앞에 속절없이 꼬리를 내린 채 안온한 욕망 속에 젖어들고 말 것인지, 저기 한 서린 부릅뜬 눈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